이 세상의 모든 시작점이자 종료점이기도
한 꼬띠(Koti)가 만들어지는 인과의
시공간은 놀랍게도 ‘찰나’에 있어
이제 인과의 원리에 집중하여 명상하여 보자. 유전윤회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중생의 태어남에 대하여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는 없지만,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는다는 인연과의 법칙에 의해 끝없이 돌고 돌아가는 무한대(infinity)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등각경 인과품 3절에 보면 “‥‥‥현상세계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과거세와 현재세와 미래세라는 삼세와 고정된 공간에 존재하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라는 삼계가 있으며 이곳의 뭇 삶들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 윤회‥‥‥”하게 된다고 하신다.
결국 이러한 현상세계의 지속적인 흐름은 중생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인 원인을 만들고 그 원인의 자양분인 조건을 성숙시켜가서 과보(결과)가 나타나도록 하는 악순환의 연속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고 변화하느냐에 따라 힘든 삶이 되기도 하고 행복한 삶이 되기도 하며 더 나은 세계로의 전환과 유전윤회로부터의 완전한 벗어남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중생이 살아가고 있는 시방세계는 범부가 살아가고 있는 욕계라는 세계가 있고,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깨우쳐 가는 수행자 중에 모든 번뇌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무루(無漏)의 경지에 도달한 아라한이 살아가는 색계가 있고, 진리를 깨우친 아라한들이 더욱 정진하여 느낌과 지각마저도 사라진 해탈의 경지에 이른 보살이 살아가는 무색계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다만 이 가르침에서 우리는 보살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학적으로 배워온 보살의 지위는 ‘이미 부처를 이루었지만 중생구제를 위해서 잠시 사바세계에 머무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보살은 아직 붓다를 이루지 못한 중생계의 지혜로운 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법회 때마다 염송하여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들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안진호스님이 집필하여 오늘까지 염송되고 있는 의식집인 ‘석문의범’ 삼보통청에서 불법승삼보를 청하는 ‘청사’에 보면 ‘대지문수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지장보살,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시방에 항상하신 청정승보님을 청합니다.’라고 각각의 보살을 승보로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즉 붓다의 가르침처럼 보살은 무색계라는 삼계에 속한 중생일 뿐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제라도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시방세계에서는 각각의 중생들이 하나의 만듬을 일으키는데 이 궁극점을 빠알리어로는 꼬띠(Koti)라고 한다. 이 꼬띠는 시간과 공간의 교접점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나’이기도 하고 또 다른 ‘나’인 ‘너’이기도 하다. 또한 중생이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하고 ‘늙고 병들거나 죽음에 이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학업의 시작’이기도 하고 ‘학업의 종료’이기도 하며, ‘사업의 성공’이기도 하고 ‘실패’이기도 하다. 또 ‘수행의 시작’이기도 하고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시작점이자 종료점이기도 한 이 꼬띠가 만들어지는 인과의 시공간은 놀랍게도 찰나(Khaṇa)에 있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현원 기자(bultopnews@naver.com)
저작권자 © 불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