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저항의 수행자, 만해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중략)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기억할 때 하나의 이름, 하나의 역할만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을 말할 때 그를 시인으로만, 혹은 승려나 독립운동가로만 좁혀 두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의 생애는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는 복합적 결의 기록이며, 서로 다른 얼굴이 서로를 비추며 더욱 선명해지는 존재였다.

한용운은 세속의 욕망을 버린 승려였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세상을 끌어안은 혁명가였다. 「님의 침묵」의 서정은 불교적 공(空)의 세계를 닮았지만, 그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침묵의 폭력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는 ‘님’을 잃은 슬픔을 노래했지만, 그 ‘님’은 단순히 연인의 부재가 아니라 조국의 상실, 자유의 상실을 은유하는 상징이었다. 침묵 속에 깃든 울림은 그래서 더욱 컸다.

그는 서북단의 한촌(寒村)에 칩거한 김소월과 달리, 서울[京城]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중앙의 문단에 올연히 서 있던 초대형의 시기(詩器)였다. 근세 1백 년 최대의 불교인이자 가장 완고한 불기(不羈)의 민족주의자로 3·1운동 서명자 33인의 한 사람이며, 최대의 유신(維新) 사상가이자 독립·사회 운동의 탁월한 조직 실천가였다. 또한 고고한 선승(禪僧)이자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최고로 개발한 시인이며, 작가·번역가로 활동했다. 근대 문인의 최연장자였던 그에 비추어보면, 경성 문단의 소란스런 시인 작가들은 거봉(巨峰) 앞에 키를 재는 작은 언덕들이었다.

1920년대 한국 사회는 절망과 무기력이 만연한 시대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그 어둠 속에서도 저항의 길을 택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그는 옥중에서도 “사람은 감옥에 넣어도 진리는 넣지 못한다”는 신념을 거두지 않았다. 승려로서의 고요함과 독립운동가로서의 결기가 한 사람 안에서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교계를 대표해 3·1 독립선언서에 서명, 이 운동의 일선에 참여한 만해는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설득해 첫 서명자로 끌어들였으며, 육당 최남선의 선언서를 몇 자 수정한 뒤 유명한 ‘공약 3장’을 추가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끌려갈 때 그는 이른바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제시했으니,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법정의 심문에서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데 왜 일인(日人)의 재판을 받느냐”고 대답을 거부, 그 대신에 쓴 것이 명논설 「3·1독립선언 이유서」였다.

한용운의 사상과 문장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사랑을 말할 때 책임을 말했고, 자유를 말할 때 고독을 말했다. 현실의 무게에 눌리지 않는 정신적 독립, 그것이 그의 일생을 관통한 단 하나의 중심선이었다.

오늘날,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시를 다시 읽을 때, 우리는 그저 과거의 문학을 펼쳐 드는 것이 아니다. 비통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한 시대의 몸부림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침묵’이었다. 님과의 ‘침묵’은 소통이 단절된 암울한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인내의 시간이다. 침묵하는 님을 기다리는 것은 독립이라는 필연적인 미래를 묵묵히 준비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조용히 저항했고 고독 속에서 사랑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들은 지금도 여전히 물음표로 다가온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기다리며 침묵하고 있는가.”